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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논개 그녀삶에 대한 이야기

by 꿈을 만드는 사람 2020.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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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그녀에 대해 알아보자

 

논개 사당도

논개 하면 적장을 끌어안도 물속으로 뛰어든 기생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부분은 여기까지이다

그래서 그녀의 삶이 궁금해졌다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기록이 거의 없었다

내가 알아낸 부분 중에서 객관적인 자료만 기록하려고 이 글을 작성한다

 

논개는 출생일은 없고 1593년에 사망했다는 기록만 남아있다

임진왜란 중 진주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을때 진주목 관기였던 논개가 왜장을 유인하여 함께 순국하면서 의기가 되었다

논개가 왜장과 수장된 바위 의암

논개의 출생이나 성장과정은 추측만 있을뿐 기록이 없다

전라도 장수 출신 이라는 이야기, 양반 가문 출신이라는 이야기 성이 주 씨라는 이야기 등 문헌자료가 없는 상황이라 이 이야기가 맞다, 아니다 확실할 수는 없다

 

 

 

처음 논개의 이야기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 오던 이야기가 기록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도 모른다

추정으로는 1620년경부터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추정될 뿐이다

 

 

진주성이 왜적에게 짓밟힐 때 기녀로서 적장을 유인하여 남강()에 빠져 산화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었다. 구전되어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헌이나 금석문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620년경부터라고 추정된다.

 

민속도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기녀라는 신분은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기녀가 나를 위해 순국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몽인이 어우야담에 채록하여 문자화 된 것이다

논개가 뛰어 내린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고, 그녀의 애국적 행위를 기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당시 관기를 얼마나 멸시 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가 바로 [동국 신속 삼강행실도]에 논개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유교 국가에서 관기를 표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편집자들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녀의 신분이 그녀의 애국심마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게 했다

 

"진주 성민들은 달랐다"

 

매년 성이 함락된 날 논개의 의혼을 위로하고, 국가적인 추모 제전이 거행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경상 우병사 최진한은 1721년 기녀 신분으로 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논개의 의열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였다

 

논개 사당

 

 

논개의 애국에 대한 포상으로 봉작을 내려주고 사당을 건립했다

이후 경상 우병사 남덕하의 노력으로 이기사가 의암 부근에 세워지고, 국고 지원으로 논개 추모제가 매년 성대히 

치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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